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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년 부산사업추진위원회 (Busan Derhocratic Mornorial Association)

6월 민주항쟁의 점화

2.7 추도대회

부산시경은 6일 밤 신민당 제1지구당을 급습하여 전단 2천2백50장과 확성기 2개, 앰프1개를 압수했다. 동시에 시 전역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208명을 연행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마치 1980년 5월 18일 전야 같은 을씨년스런 분위기였다. 평소 공안당국에서 감시하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사무국장 김재규(40), 부산대 1986년 써클연합회 회장 이명곤(23. 부산대 중어중문학과4), 신민당 제1지구당 사무소장 최천기(55)등 70명에게 가택연금령이 내려졌다. 오전 7시부터 중구 광복동에서 부평동 파출소까지와 창선파출소에서 미문화원에 이르는 도로변의 주차를 일체 금지시키고, 미문화원을 중심으로 시내버스 정류소 4개소, 남포동 일대 시내버스 3개소 등 상오 7시부터 정류소를 폐쇄시켰다. 대청로, 남포동, 광복동의 택시 승강장도 폐쇄하고 도로의 행인 및 차량통행도 전면 금지시켰으며, 소방차 3대, 가스차 4대를 대기, 18곳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런 조치로 인하여 신창동 유나백화점과 새부산상가, 국제시장 등 500여개의 점포가 철시하였다. 경찰은 어떤 형태의 집단적 시위도 철저하게 원천 봉쇄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봉쇄당한 공포의 거리도 부산시민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과감한 투쟁정신을 막지는 못했다. 낮 12시30분께 검은 리본을 단 신민당 청년당원들이 광복동 미화당 앞에서 대각사로 들어가려다 경찰이 제지하자 맞고함을 치며 물러났고, 20분 후에는 당원과 학생 수백 명이 대각사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하자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2.7추도대회_국제시장사거리

경찰은 저지선을 뚫으려는 시위대들을 향해 사과탄과 다연발탄(일명 지랄타)을 마구 쏘았다. 이 순간 길을 지나가던 제일동포 김우근씨(63. 일본 오사카거주)가 사과탄 파편에 맞아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오후 1시 20분경에는 창선동 국민은행 부산지점 앞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였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밀려 도망 다니면서도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반정부구호를 외쳤다. '애국 부산 시민에게 드리는 글' '누가 이 젊은이를 살해 했는가'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학생들은 시청 쪽으로 행진하면서 남포파출소에 투석을 하기도 했다. 오후 1시 55분 부민협 회원인 송기인 신부, 노무현 변호사, 김광일 변호사, 김재규 사무국장, 고호석 사무차장 등의 재야인사, 민주단체, 신민당원, 구속자 가족 30여명이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초조하게 오후 2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각사 주변으로 몰려다니며 경찰과 산발적 충돌을 벌였던 시위 군중들이 오후 2시경 집결지인 부산극장 앞으로 몰려와 300여명이 집결했다. 이날 디머(시위주동자)의 역할을 맡기로 예정되었던 부민협 김재규 사무국장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타나 "죽은 사람 추모제도 못하게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제부터 여기에서 박종철의 추도식을 거행하겠다."고 운을 뗀 뒤 폭압적인 군사고문정권을 맹비난하였다. 연설 중간 중간마다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애국가',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군중들은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노무현, 김광일 변호사가 등단하여 연설을 할 때,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허겁지겁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며 추모 집회를 해산하고자 하였다.

최루탄이 발사되자 추도객들은 즉각 시위대열로 바뀌었다. 시위대가 '독재타도', '고문추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제일극장을 돌아 국제시장 쪽으로 진출하자 도로변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시민들은 자석에 끌린 듯 자연스럽게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 기껏 박수나 쳐주고 방관만 하던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시민들도 깊이 분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넓고 깊어지듯이 시위대열은 움직일수록 급속도로 불어났다. 만여 명이나 되는 시위군중이 충무로에서 시청으로 이어진 간선도로를 꽉 메웠다. 그러나 당시의 신문을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군중의 수가 나오지 않는다. 최고로 모인 사람들의 수가 '700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축소 보도 밖에는 없었다.

2.7추도대회_사리암

당시 부민협의 사무차장이었고 이후 국본 사무국장을 맡았던 고호석씨 증언을 들어보자.

"2.7대회준비시 예상 밖으로 큰 반응이 있었다. 김재규 부민협 사무국장이 디머 (시위 주동자)였다. 대각사 주변을 봉쇄했으나 주변의 사람들이 많았다. 부산극장 앞 에서 디머의 개최선언과 동시에 5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어 김광일, 노무현 변호사가 연설을 하자 전경들이 최루탄을 난사하여 사람들이 흩어 졌다. 추모대열은 극장가 쪽에서 국제시장으로 들어가 시청앞을 돌면서 흩어졌는데 오후가 되자 시위대열은 만여명 으로 불어났다. 부마 민주항쟁 이후 최대의 시위군 중이었다."

당시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2천여 명이 간선도로를 꽉 메우고 시위를 벌였으며, 저녁까지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2만명이 넘었다'고 증언한다. 부산극장 앞의 추도대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리 재야 종교단체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단체 에서 집회장소와 연설자를 정하고 조직적인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7을 계획하고 준비한 사람 조차도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참가하여 열렬히 호응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당시 디머로 나섰던 김재규씨는 "마치 1979년 부마 민주항쟁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위와 집회를 열어 봤지만 억압공간에서 시민들의 큰 호응을 덛지 못했다. 그날도 경찰이 워낙 강력하게 원천 봉쇄하려 했기 때문데 평소와 같이 일상적인 시위로 그칠 중 알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우리의 움추린 예상을 훨씬 앞질렀다. 폭발적인 시위양상을 보고 나중에는 두려움조차 느끼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두환정권이 이제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을 부 산의 2.7시위는 확연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날 대회장 주변에서는 몇 가지 색다른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오부터 창선 파출소에서 미문화원까지의 도로가 완전 차단되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게 된 '새부산예식장'에서는 "하오 1시에 예정된 장문혁 군과 신경숙 양의 결혼식을 아리 랑호텔로 옮깁니다"는 피켓을 들고 다니며 안내를 해 눈길을 끌었다. 또 대각사 맞 은편에 위치한 동주여상은 하오 2시부터 시작되는 1천 500여명의 2부 학생의 등교가 불가능해지자 인근 국도극장에 단체 영화관람을 시키는 편법을 썼다. 이날 택시, 버스, 트럭, 트레일러 등이 오후 2시를 기해서 일제히 경적을 울리기로 했는데 뒤따라 오는 버스 한 대가 경적을 울리지 않자 앞 버스가 길을 막아섰다. 앞 버스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항의하는 뒤편 버스 운전기사에게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못간다고 시 비를 걸어 한동안 교통이 체증되었으나 따라오는 버스 운전사가 경적을 울림으로써 다시 교통이 원활하게 되기도 했다.

3.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 평화대행진

2·7추도대회로 자신감을 얻은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이하 추도위)는 박종철의 49재를 평화 대행진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고문으로 들어있는 추도위의 성명서를 살펴보면,

2일 9일부터 3월3일까지 선포된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 결의기간'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국민들의 용기와 정성으로 동참하여 주심에 경의와 감사를 올립니다.

-중략-

추도회와 기도회조차 봉쇄당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고문추방을 위하여 고문추방이 실현될 수 있는 민주화를 위하여 국민적 결의를 정부와 권력을 향하여 보여야 합니다. 그 방법은 단호하고 분명하며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3월 3일 고 박종철군 49재를 맞아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 평화대행진'을 선언하며 국민 여러분의 동참을 믿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왜 행진하는가.
1. 고 박종철군 등 고문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2. 불법연금, 강제연행, 검문검색 거부
3. 단기구금(구류), 압수수색영장 남용 항의
4. 일체의 고문수사 반대, 고발5. 고문 자백증거에 의한 재판반대
6. 고문살인사건(우종원, 김성수, 신호수 등), 고문용공 조작사건(백기완, 이태복, 김근태, 김문수, 권양 등) 진상 규명과 책임자처벌 요구
7. 고문자백을 근거로 구속복역 중인 양심수 전원석방 요구
8. 고문근절을 위한 민주화 실현
9. 입법, 제도개선(국정조사권 있는 국회기구 등) 요구

1987. 2. 23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

2·7추도대회의 진압에 실패한 부산시경은 사흘 전부터 내린 갑호 비상령에 따라 도심지마다 겹겹이 저지선을 펼쳤다. 3월 2일 최성묵, 김기수 목사 등 재야인사 50명을 자가 보호 조치한 가운데 사리암과 대각사 주변에 경찰병력을 2천여 명을 배치했다. 중구 남포동 등 부산의 중심가에는 아예 전경들이 깔려 행인들은 거리에 시민보다 경찰이 더 많다고 비아냥거렸다. 도심은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고 이 통에 이 거리에 자리 잡은 부영극장과 부산극장 등 4개 극장은 황금시간에 관객이 없어 영화 상영을 중단해야만 했다. 3월 3일은 원천봉쇄가 워낙 심한데다 2·7대회로 얼굴이 알려진 재야인사와 민주인사들이 검거되거나 연금 당하여 분위기가 제대로 고양되지 못할 것 같았다. 3월 3일 오전 부산 사하구 괴정3동 사리암에서는 박종철의 49재를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가졌다. 이번 49재에는 박군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어머니 정치순씨를 비롯하여 가족친지들과 조계종 총무부장 향봉 스님, 해인사 주지 명진 스님, 통도사 청하 스님, 신도 등 4백여 명이 참석했다. 49재는 4시간 동안 진행했다. 소설가 김정한씨(80)가 지팡이에 노구를 이끌고 사리암을 찾아오자 49재 행사의 주최측은 예정에도 없던 김정한씨의 애도사를 식순에 넣기도 하였다.

오후 6시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신민당 당원과 부민협 산하 재야인사 2백여 명이 동양관광호텔 앞에 나타났다. 이들이 로얄호텔 앞까지 2백미터 가량 침묵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경찰이 달려들어 '퍼내기'작전에 들어갔다. 퍼내기 작전이란 시위자들을 연행해 몇 시간 내 도심으로 돌아올 수 없는 시 외곽의 외딴 곳에 내팽개치는 것을 말한다. 시위의 주도자들이지만 잡아봤자 구속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퍼내기'의 대상이었다. 경찰이 정한 퍼내기 대상으로는 야당 국회의원들과 그 누구 보다 적극 적인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이날 경찰은 이들을 닭장차에 태운 뒤 시 외곽인 송정 등지로 퍼내었다. 이 당시 부산출신 야당의원들은 대부분 직선제 개헌의지를 가지고 길거리의 민중들과 함께 투쟁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국회의원들이 실려 간 15분쯤 뒤 미화당 부근에 모여 있던 대학생 수백 명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반정부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시도했다.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규합하여 남포동으로 진출했으나 강력한 경찰의 저지로 다방골목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6시30분경 학생들은 '고문타도를 위하여'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충무동 로터리에 재집결하여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사과탄을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35명을 연행하므로써 7시경 도심의 산발적인 시위는 끝났다. 이날 대각사 주변과 남포동, 충무동, 사상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밝힌 시위자는 신민당원, 대학생, 재야 관계자 등 모두 500여 명이다. 2.7대회 때의 2만 여명을 '700명'이라 보도한 것에 비하면 꽤 양심적(?)인 발표였다.

3.3 대행진과 관련하여 전국에서 모두 439명이 연행되었고 이중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부산시경은 이날 학생과 시민 120명을 연행하여 적극가담자 3명은 구속하고, 15명은 즉심, 나머지 112명은 훈방 조치하였다. 경찰이 구속하기로 한 3명은 양창석(부산대 경제학과 3년), 이승문(부산대 공과대학 4년), 서재호(동아대 경영학과 3년)이다. 양창석과 이승문은 3일 밤 9시20분께 부산 북구 괘법동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앞길에서 화염병을 갖고 '독재타도'을 외치며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인솔하여 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서재호는 오후 7시30분께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제과 앞길에서 화염병 10개를 가방에 넣고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구속된 학생들의 위치를 보면 시위대가 남포동과 사상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위대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사전에 상황실을 만들어 모니터(중간 연락책)를 가동시켰다. 이들 모니터들은 현장의 시위 상황과 경찰의 배치상태 등을 상황실에 제 때에 보고함으로써 전체의 시위 흐름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후 벌어진 6월민주항쟁 때도 상황실과 모니터를 가동시켜 큰 효과를 보게 된다. 

3.3대행진_대각사

3.3대행진_대각사앞

민주화의 갈림길 : 4.13호헌조치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요지는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 등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개헌 논의를 지양하고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를 결정할 것이며,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폭력과 좌경 세력은 엄정히 다스리겠다." 는 내용이었다. 관제 언론들은 '마침내 와야 할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으로 4·13 호헌조치를 안정을 위한 중대한 용단 등으로 미화하거나 아첨하는 기사로 지면과 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각종 정부기구를 통한 호헌지지의 유도 공작에도 불구하고 4·13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여론에 부딪치고 말았다. 각계각층에서 호헌 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서와 서명, 농성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대한변협이 재빨리 호헌 반대 성명서를 발표한데 뒤이어 전국의 신부, 수녀들이 4·13호헌조치 철회를 위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목회자들은 반대기도회에 들어가고 사회단체와 대학교수들이 반대성명서를 내거나 시국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매일같이 성명, 농성, 단식, 삭발, 기도회가 계속 되었고, 뻔뻔스런 관제 언론에 분통이 터져 TV를 박살내거나, 대문에 '신문사절'을 써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시책에 대해서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이처럼 열화같이 집단적으로 반발한 사례는 건국 이래 없었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4.13_호헌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