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카피라이트 바로가기

6월 민주항쟁 30년 부산사업추진위원회 (Busan Derhocratic Mornorial Association)

2.7추도대회

6월 민주항쟁의 제1단계 : 6월 10일에서 6월 17일까지
6.10_최루탄 발사 6.10_충무동 로타리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부산 시민대회

6월 10일 오후 6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부산 시민대회'가 예정된 시내 대청동의 대각사는 고요한 적막 속에 경찰의 철통같은 경비가 대각사 반경 1km를 에워싸고 있었다. 광복동, 남포동, 충무동 등 주요 지역의 골목마다 완전 무장한 병력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대각사 집회가 원천 봉쇄되었음을 확인한 부산대 학생들이 부산의대(대학병원)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여기서 경찰이 병원 안쪽으로까지 최루탄, 지랄탄을 난사함으로써 병원 출입자들 뿐만 아니라 환자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대의 숫자는 오히려 불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광복동 로얄호텔 앞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자갈치시장 쪽으로 밀려난 뒤, 시위대를 형성해서 또 다른 대열을 이루었다. 경찰은 이날 시위대와 시민들의 연대를 막기 위해 처음부터 최루가스를 무차별 살포했을 뿐만 아니라, 최루탄 발사 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마저 무시했다. 이날 대부분의 시위 부상자가 구경하던 시민들 중에서, 그것도 파편이나 직격탄으로 인한 부상이었던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부상자는 시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자갈치 시장에 어머니 대신 수금하러 나왔던 시민 김현숙씨(27 여. 강서구 대저동)가 얼굴, 손, 팔, 가슴에 최루탄 파편 70여개가 박히는 부상을 당했으며, 로얄호텔 앞에서는 5세가량 되는 여아가 사과탄 파편에 안면을 맞아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경찰의 이런 초기 과잉진압은 구경하던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고, 투쟁의 불길을 당기는 불씨를 제공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연행자의 수에서도 잘 나타난다. (6월 10일 시위에서 총 1백70명이 연행되어, 12일 8명이 구속되고 43명은 즉심에 회부되었다. 구속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영규(동아대 수학과 4년) 이상철(부산대 영어교육과 1년) 김정수(20세, 무직) 이광우(부산대 심리학과 1년 휴학) 김대곤(24세, 무직) 김형태(부산외대 독어학과 1년) 권순철(수산대 어업학과 3년) 서호경(19세, 무직))

곳곳으로 흩어진 시위대는 오후 8시경 다시 부영극장 앞에 모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동광초등하교 인근에서 처음으로 경찰 1개 중대가 도망을 가다가 시민들에게 포위를 당하여 무장해제될 정도였다. 그날의 투쟁은 11시를 넘어서까지 지칠 줄 모르고 진행되었다. 시위대들은 특정 장소에서 거대한 군중을 형성하는 대신에 시내 각처로 흩어져 자연 발생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원천 봉쇄를 계획하였다가 뜻하지 않게 산발적으로 전개된 이런 시위형태는 경찰의 작전망을 흩뜨려 놓았다. 반면 시위대는 도심지 투쟁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1979년 부마 민주항쟁 때 이미 그 위력이 확인된 바 있던 '동시다발의 기동성 시위' 방법을 전개해 나갔다. 학생 전위대들이 태극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몇 개의 시위대가 형성되는 식으로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이날 대대적인 투쟁을 통해 터득한 시위방법은 이후 이어지는 가두에서 계속 응용 발전되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시위는 자정을 넘겼고, 시민과 학생들 중의 일부는 고 박종철군 가족들이 농성 중인 보수동 중부교회에 모여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우리 종철이를 살려내라", "애국시민 단결하여 사기정권 몰아내자!" 등 그들의 구호와 투쟁 결의는 밤이 깊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6월 11일 부산지역 각 대학 ‘6·10 투쟁 보고대회’ 개최

다음날 11일에도 부산과 대구, 마산 등 영남지역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투쟁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학생들은 즉각 '6. 10 투쟁 보고대회'를 개최하였다. 살인적인 진압을 규탄하는가 하면, 계속적인 투쟁을 결의하며 대열을 재정비했다. 보고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각 학교별로 거리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곧장 시민들과 합세했다. 가물어 갈라진 땅을 적시는 물이 고랑마다 흘러 다니듯 시위대는 거리거리를 누볐다. 부산 가톨릭센터 앞에는 5백여 명 정도가 시위대를 형성했다. 교통이 차단되고 경찰이 몰려오자 곧 투석전이 시작됐다. 이 시각 시내 곳곳은 학생 시위대의 물결로 뒤덮였다. 시민들은 제2의 부마 민주항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시민들의 합세가 조금씩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6월 12일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구덕운동장의 함성’

부산지역은 12일부터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부산지역 총학생회 협의회(이하 부총협) 소속 대학생 1천5백여 명이 수산대학교에서 연합집회를 개최하고 교문투쟁을 벌였다. 연합집회에 앞서 이미 기말고사를 거부했던 부산대생들과 이날 시험거부에 돌입한 부산산업대(현 경성대)생 등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부산대 교문투쟁에서 경찰은 사상 최초로 64연발 다탄두 최루탄 발사기(이전의 일명 '지랄탄'은 32연발)를 실전 배치했다. 각종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해서 시민들과 함께 연인원 1만여 명의 끈질긴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밤 8시경 서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축구경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동아대 대신동 캠퍼스에 모였던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가두 출정식을 벌이고, 시내로 나가는 길에 구덕운동장 앞에서 동대신동 3파출소를 습격하고 집회를 가졌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시민들과 합세하기 위해서였다. 4백여 명의 학생들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연좌했다. 하지만 시간이 다소 빨랐다. 그들이 맞닥뜨린 사람들은 관중들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다짜고짜 최루탄을 쏘아대었다. 경찰이 쏜 최루가스는 시위대에게만 아니라 경기장에도 날아들었다. 축구경기가 30분 동안 중단되었다가 다시 진행되기도 했다.

6월 13일 ‘전방입소훈련을 마친 수산대, 산업대 학생 부산역 시위’

부산대는 연일 7, 8천 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교문투쟁에서 경찰 저지를 뚫고 수천 명씩 거리로 밀려 나갔다. 13일에는 사직동 고속터미널로 진출하여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이날 저녁 7시경 부산역 플랫폼에서는 1천여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전방 입소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수산대와 산업대 학생들 이었다. 광장으로 나온 학생들은 집으로 가는 대신 연좌 농성을 벌였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지나던 시민들과 대합실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거에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구릿빛 얼굴을 하고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호헌 책동 저지하여 민주헌법 쟁취하자‘고 외쳤다. 주위의 시민들은 인근 상점에서 '쭈쭈바'를 수십 개씩 사서 시위대 위로 던졌다. 1시간여 동안 연좌시위를 하던 거대한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흩어져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위를 계속 벌여 나갔다.

6월 14일 ‘축구장에서 야구장으로 함성은 이어지고’

14일에도 역시 부산시내 대학생 8천여 명이 교내시위 후 가두시위를 벌였다. 마침 사직야구장에서는 해태와 롯데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를 마칠 무렵, 응원 구호가 "화이팅" 대신에 "독재타도"로 돌변했다. 시민들은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 '애국가'를 연창했다. 경기가 끝나도 관중들은 빠져 나오지 않았다. 계속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자 경찰들이 강제해산에 들어갔다. 빠져 나오면서도 시민들은 여전히 구호를 외치고 함께 마음을 다지는 여유까지 보였다.

6월 15일 ‘일요일에도 투쟁의 불길은 타오르고’

15일은 일요일이었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시내 각 대학에서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마치 일상의 과업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형식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하여, 전날 가두의 결과 보고, 부상자 현황, 전국의 투쟁 상황, 반성과 방향성, 토론 등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에는 학과별로 모여 그 날의 가두장소를 연락받고 해산했다.
이 날도 부산대 6천여 명, 산업대 1천여 명, 수산대 1천여 명 등이 교내시위 후 가두로 진출했다. 일요일 시내를 찾았던 많은 시민들은 무리지어 나온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동조하거나 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저녁 7시경 서면에 집결한 시위대 1천여 명은 동보서적 근처에서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역시 일반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학생들을 구출해 주는 아주머니나 육교 위에서 시위대를 향해 돈을 뿌리는 시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밤늦도록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며 곳곳에서 게릴라식의 시위를 벌였다. 부산역 광장은 이제 부산시민들의 정치 토론장이 되고 있었다. 시위대는 서면과 범내골, 광복동, 국제시장 등지에서 자정까지 시위를 벌였다.

6월 16일 ‘부산의 명동성당, 가톨릭센타 농성 시작’

16일부터 경찰버스 방화, 파출소 습격 등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하게 변하였다. 이 날은 부산대 5천여 명 등 9개 대학 1만 여명이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시내에서 연합시위를 벌였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시위대 5천여 명은 충무동 시위대와 합세하면서 남포동 거리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시위대는 금방 1만 여 명을 넘어섰다. 대중 집회를 마친 남포동 시위대는 인근 시청 옆 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으로 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경찰 저지선까지 이동한 시위대는 연좌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화적 연좌시위도 아랑곳 않고 몇 차례 경고 방송과 함께 곧바로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진격했다. 흩어진 시위대는 국제시장과 대청동, 보수동 등지로 나뉘어 시위에 들어갔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폭력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소규모 시위대는 경찰 진압에 밀려 영선고개 쪽으로 피하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인근 공사장에서 가져온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따위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윽고 몰려온 경찰들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졌다. 대치 시간이 차츰 길어졌다. 학생들은 대학별로,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곳곳에 불을 지펴 놓고 투쟁 의지를 다졌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은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 중 일부는 가톨릭센터 쪽과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가톨릭센터 쪽에서는 비상시에는 센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고립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전방위 해산작전은 끈질기게 계속됐다. 시간은 흐르고 사태가 장기화되자 시위대는 최루가스를 뒤집어 쓴 채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센터 문을 잠근 시위대는 대열을 정비하고, 농성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경찰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흩어질 것인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논의는 가톨릭센터를 사수하여, 투쟁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데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해산하는 23일까지 가톨릭센터의 농성은 부산지역의 시위를 이끄는 구심적 역할을 해내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6월 17일 ‘조도 상륙전과 해양대생들의 투쟁’

17일간의 부산지역 대학들의 사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가톨릭센터 농성 소식이 알려지자 상당히 고무되기 시작하였다. 12시경 동아대 하단캠퍼스에서 출정식을 마친 동아대 학생들은 하단 삼거리를 점거한 후, 괴정 삼거리까지 행진을 벌였다. '군부독재 타도, 양심수 석방, 호헌철폐'를 계속 외치며 나아가다 괴정 삼거리에서 경찰과 충돌, 1시간 30분 동안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했다. 경찰과 학생 모두 상당한 부상자를 내었으며, 시위대는 일단 흩어져서, 대신동 구 덕운동장 육교에서 재집결했다. 오후 2시경 대신동에서 1천여 명으로 대오를 갖춘 학생들은 그대로 충무동과 남포동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돌격대를 구성하여 충무1파출소를 습격하여 연행된 동료학생을 구출하기도 했다.비슷한 시각 영도가 술렁거렸다. 해양대학교는 시위를 하면서 학교에서 바로 시내로 진출할 수 없었다. 해양대(조도)와 영도의 유일한 통로인 방파제를 경찰이 막아 이를 뚫을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일은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북항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해양경찰 쾌속선이 전경들을 방파제에 풀어 놓았다. 학생들은 섬 쪽으로 몰렸다. 시위대의 허리가 잘리면서 정면 돌파는 실패했다. 시위진압을 위해 배까지 동원된 이 사건을 일러 '조도 상륙작전'이라 불렀다.부산지역은 17일부터 '가톨릭센터 농성'지지 투쟁을 중심으로 결집되기 시작했다. 오후 6시 30분경 국제시장에는 1천 5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가톨릭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저지로 흩어져, 8시경 다시 시청 쪽으로 모였다. 대략 5천명의 시민들이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다. 9시 30분, 부산역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1만 여명이 질서 정연하게 대중 집회를 개최하였다. 시민들은 부산역 근처의 KBS 방송국을 점거하자고 외쳤다. 시위대는 제도 언론의 왜곡과 편파 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언론인 「민주부산」(국민운동 부산본부), 「절규」(부산대 총학생회)와 그 외의 유인물을 들고 다니면서 주변의 상가와 인도의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편집이 서툴고 철자법이나 맞춤법이 틀린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세련되게 인쇄된 신문보다 엉성하게 만든 이런 진솔한 유인물을 오히려 더 신뢰하였다. 시민들은 연일 KBS 방송국 앞에서 경찰들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밤 10시가 넘자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은 3만에서 4만 가까이 이르렀다. 주변 상가의 아주머니들은 물수건을 날랐고, 치약을 준비해서 시위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날 자정을 넘기면서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경찰 지원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의 제2단계 : 6월 18일에서 6월 25일까지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6월 18일 부산은 전날부터 거의 시민봉기에 가까운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정부도 즉각 대응하기 시작했다. 10개 대학이 서둘러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부산지역 대학생 2만 여명이 부산대에 모여 '부총협' 연합출정식과 대동제를 마치고 시내로 진출하면서 국본이 주체한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 및 시위는 시작됐다. 양정로터리와 부산진시장 주변에서부터 시위대가 형성되어 서면로터리로 합쳐지면서 대규모 집회로 변모했다. 6만 여명이 넘는 군중들 속에서 시민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이 하나가 되었다. 평소 사상공단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해도 언제나 조용하였다. 그 날도 5백여 명의 부산대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오후 6시, 평소와는 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잔업을 거부한 노동자들이 하나 둘씩 나와서 시위대에 가세하였다. 참가하는 노동자들의 숫자는 차츰 불어났다. 공단의 북쪽에서부터 서부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노동자와 학생이 거의 비슷한 수로 모여 연합시위를 벌였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주례와 가야로 를 거쳐 서면으로 향하는 동안 경남전문대생들과 다시 합세했다. 이날 시위는 1980년대 초 반부터 꾸준히 노학연대의 기치를 들고 사상공단 가두 투쟁을 벌여왔던 학생들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비로소 노동자와 학생 간에 하나가 되는 연대감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서면에는 이미 30여만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 로터리를 중심으로 부산상고 앞 대로와 부전시장 방면, 그리고 범내골 일대의 큰길에는 인파로 가득하였다. 왕복 8차선의 5-6km가 시민들로 가득찼던 것이다. 한 동안 최루탄을 쏘아 대던 경찰도 마침내 진압을 포기하고 말았다. 군중의 긴 대열은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처럼 물결쳤다. 정치집회를 주최하는 사람들이나 대열을 형성했던 사람들이나 모두가 상기된 표정이었다. 부산시민들은 부마민주항쟁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가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신념을 마음속으로 재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각 남포동에서도 시위는 일어나고 있었다. 오후 7시, 국제시장, 남포동, 보수동 로터리 등지에서 수천 명 단위로 시위대가 형성되어 시청과 부영극장 쪽으로 이동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서면 시위대는 남포동 쪽 시위대와 합세하기로 하고 부산역 쪽으로 향했다. 서면 시위대는 범일 고가도로로 진출하여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의 최루탄 난사에 투석전으로 맞섰다. 일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부두길을 거쳐 부산역으로 진출하고, 일부는 서면과 부산진시장 쪽으로 대열을 정비했다. 밤 10시경이었다. 서면 시위대는 한 명씩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촛불 시위대는 서서히 전진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여들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함성은 거대한 촛불 시위대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다시 범일고가 도로를 통해 이어지는 좌천동 고가도로(일명 '오바버릿지')를 통과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에 부딪쳐야 했다. 인파는 도로와 고가도로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시위대가 전진을 시도하자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루탄가스가 만들어 낸 연무로 뒤덮인 고가도로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이태춘씨였다. 그는 곧장 인근의 봉생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4일 저녁 결국 숨지고 말았다. 민주화의 투쟁에서 또 하나 산화한 아름다운 꽃!

새벽 0시를 넘기면서 시위대는 기나긴 투쟁 끝에 경찰 저지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시위대는 기세를 몰아 KBS 앞으로 몰려갔다. 다시 방송국 앞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태춘씨의 비보가 전해진 뒤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2만 여명이 넘는 시위군중이 밤을 새우며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화염병이 방송국으로 날아들어 각종 집기류를 불태웠다. 이날 KBS 앞에서 직격탄을 맞은 문철수씨(당시 33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19일 새벽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방송국 점거에 실패한 시위대는 YWCA 앞에서부터 횃불시위를 벌였다. 일본 영사관을 기습하여 유리창 42장을 깨고, 부산역으로 진출했다. 숫자가 조금씩 줄어든 시위대에 2백여 대의 택시와 대형트럭이 가세했다. 이들은 시청으로 향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한 동안 공방전을 벌이던 시민과 학생들은 다시 시내 곳곳으로 흩어졌다가 가톨릭센터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농성자들과 함께 연합 시위를 벌였다. 벌써 아침 해는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이즈음 부산에서는 차량 경적 시위와 노킹(엔진 조작으로 내는 폭음) 시위가 유행하였다. '민주택시기사협의회'라는 이름의 기사들은 밤늦은 시간에 차량 행렬로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기사식당 등을 통해 집결 장소를 전달하고 전달 받았다. 기사들은 직접 시위에 가담하거나, 유인물이나 화염병을 운송하든지, 아니면 방어벽의 역할을 기동성 있게 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시위대를 따라다니면서 화염병과 기름을 대주는 병기고가 되기도 했다. 차량 시위가 많아지고 대규모화하자, 20일 부산택시운송사업조합은 앞으로 학생시위가 진정될 때까지 당분간 밤 12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택시의 운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택시 입고가 시 당국과 택시조합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6월 19, 20일 ‘비속에서도 투쟁은 이어지고’

19일부터는 비가 내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친 빗줄기를 뚫고 일어났다. 부산시내 10개 대학과 3개 전문대생들은 이날 학교별로 출정식을 갖고 다시 시내로 몰려 나왔다. 가야로에서, 범내골에서, 그리고 범일동 중앙시장과 서면 태화쇼핑 등을 오가면서 전경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해방구를 만들었다. 시위대는 기동대를 무장해제를 시키고, 진입장비를 탈취하기도 했으며, 초량 1, 2, 3파출소, 남포파출소, 부산진파출소, 보수1파출소 등에 방화하고 집기를 파손하였다. 20일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우울한 날씨에다 18일부터 나돌기 시작한 공수부대 투입설의 유언비어로 인해 시위의 열기는 다소 소강상태에 빠진 듯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는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우산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날 시위에는 종교인들과 고등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눈에 띠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산지역 전도사협의회원 50여명과 대학생 5백여 명이 거대한 흰 십자가를 앞세우고 범내골로터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오후 1시 15분경부터 시작된 이 날 시위는 동의공고 학생 2백여 명을 비롯하여 5백여 명이 대학생 시위를 따라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 교위와 각 학교에서는 가정통신문을 보내는 등 시위 참여를 막으려 하였으나, 고교생 시위 참여자들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6.20_부산진시장 앞 6.21_서면로터리 연행
6월 21일 ‘8백6명의 연행’

21일에도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이날 시위에서는 8백6명이 연행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 이후 가톨릭센터 농성해제까지는 시위의 강도나 범위가 하향 곡선을 그리는 분위기였다. 이 시기 부산에서는 시위 부상자가 속출하여 부산의대와 치대, 고신의대, 인제의대 등에서 4학년생을 중심으로 진료반을 구성했다. 이들은 남포동 국도극장 앞에 고정 진료소를 설치하였으며 이동 진료반도 구성해서 기동성을 살리기도 했다. 제약회사에서는 약품을 트럭채로 실어 날라다 주기도 했다. 당시 이곳을 일명 '평화의 거리' 라고 불렀다.

6월 22일 ‘가톨릭 농성 해제’

부산대생 200여 명이 장전동과 온천동에서 시위를 하고, 동아대생 400여 명도 하단과 전포동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부산상고 등 3개 고교의 운동장에 시위 동참을 촉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져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날 그 동안 가톨릭 센터에서 농성을 계속하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로부터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귀가하던 중 귀가버스 1대에 남부경찰서 경찰의 보복적인 최루탄 투석과 폭행으로 17명(신부 2명, 운전사 등)이 부상하여 메리놀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6월 23일 ‘가두시위가 없었던 하루’

6·10 이후 이날 처음으로 가두시위가 없었다. 단지 부산대, 동아대, 산업대생들의 교내 집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는 신부들에 의해 다시 가톨릭센터에서 농성이 시작되었다.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 80여명의 사제단 전원이 23일 오후부터 가톨릭센터 7층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던 것이다.

6월 24일 ‘이태춘씨 사망’

각 대학에서는 '가톨릭센터 농성 귀가자 폭행 보고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서 민정당사와 경찰서를 공격했다. 6월 24일 밤 8시 40분께 이태춘씨가 사망하였다. 병원에서 신음한 지 6일만이었다. 그러나 시위 분위기는 이미 소강국면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지도부는 26일로 예정된 '평화대행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경찰은 시위주도 학생과 재야인사 등 70여명에 대해 긴급 검거령을 내렸다.

6월 민주항쟁의 제3단계 : 6월 26일에서 6월 29일까지
6월 26일 ‘평화 대행진’

드디어 26일, 평화대행진 투쟁의 서막을 연 사람들은 종교인이었다. 농성을 계속 중인 천주교 신부들은 신도 2천 5백여 명과 중앙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를 열었다. 그리고 대청동에서는 신부, 수녀 등 4백여 명을 포함하여 1만 5천여 명의 시민들이 평화행진을 하였다. 신부와 수녀들이 앞장서서 "애국시민 단결하여 폭력정권 끝장내자"라는 플랜카드를 들었다. 폭력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이 날 시위는 그야말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차츰 시위대의 숫자가 불어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경찰들은 최루탄과 다탄두를 사용하여 해산작전에 들어갔다. 같은 시각, 서면 쪽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밀리는 듯하다가, 퇴근시간부터 회사원 등 시민들이 가세하여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들은 가야 2파출소를 전소시켜 버렸다. 이 날은 운수 노동자들이 가세하여 시내버스 7대가 시위에 동원되었다. 시위대는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문현로터리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항쟁 분위기는 다시 본격적인 상승국면에 돌입하였으며, 시민들은 새로운 국면에서 승리의 확신을 차츰 다져 가고 있었다.

6월 27일 ‘故 이태춘씨 장례식’

27일 오전 10시부터 이태춘씨 장례식이 그가 다니던 범일성당에서 시민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국민운동 본부장으로 열린 장례식을 마친 시민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문현동로터리까지 4km를 2시간 30분 동안 행진하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6월 28일 ‘시민 대토론회’

28일 오후 3시, 부산 대청동 중앙성당에서는 또 다른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신부, 수녀, 신도, 그리고 학생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이날 미사는 '폭력종식과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였다. 이들은 미사가 끝난 5시부터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군부 독재 끝장내자", "폭력 종식", "직선 개헌", "최루탄 추방"과 같은 피켓을 들고 가톨릭센터까지 행진을 했다. 시가행진에서 다시 시민들이 가세하여, 5천명으로 길게 늘어선 시위대에게 연도의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가톨릭 센터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은 모조건 구호만을 외치지는 않았다. 이제 시위의 양상은 보다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어, 시민들은 즉석에서 대토론회를 개최하는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토론회에서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말하였고, 또 서로가 서로를 뜨거운 박수로써 격려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6.27_범일성당
29일 ‘6·29 선언’

전국적으로 엄청난 대규모의 투쟁이 계속되자 지배자들의 두려움은 더해갔다. 이 두려움은 드디어 6·29 선언으로 나타났다. 1987년 6월에 뜨겁게 타올랐던 전 국민의 투쟁 앞에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고 개정된 헌법에 의거, 연내에 선거를 실시한다.
  •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한다.
  • 김대중씨를 사면하여 복권시키고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을
    대부분 석방한다.
  •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한다.
  • 언론자유를 창달한다.
  •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대학을 자율화한다.
  •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
  • 과감한 사회정화를 실시한다.
6.29_선언
국민운동 부산본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지도부로서t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결성은 다른 어떤 지역 보다 빨랐다. 서울에서 국민운동 본부의 건설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던 5월 20일 2시 당감성당에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와 종교계, 통일민주당, 학생, 노동자 100 여명이 모여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한다. 이후 전국 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로 개칭하였다. 이와 같이 부산의 민주화 운동에서의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조기결성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부산의 6월 민주항쟁을 보다 힘차고,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조직구성을 보면 '고문', ‘공동대표’,‘집행위원’.‘사무처’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공동대표에는 최성묵, 박승원 등이 있었고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 사무국장에 고호석 등이 활동하였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부산지구기독청년협의회’, ‘부산NCC인권위원회’, ‘사회선교부산지구협의회', '부산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 '천주교 정의구현 부산교구 사제단', '경남지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부산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부산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통일민주당 1, 2, 3, 6지구당', '부산지역 총학생회 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기관지로서 제도권의 언론보다도 더욱 신뢰를 받던 거리의 신문 ‘민주부산’은 김진모(편집장), 김정호, 양은진 등에 의해 제작되었다.

  • 공동대표
    • 최성묵 목사(부산민주시민협의회 회장)
    • 서석재(통일민주당 부산 제2지구당 위원장)
    • 박승원 신부(천주교 정의구현 부산교구 사제단대표)
    • 김정수(통일민주당 부산 제3지구당 위원장)
    • 김광남(부산민주화 실천 가족운동협의회 회장)
    • 문정수(통일민주당 부산 제6지구당 위원장)
    • 권광식(부산지구 기독청년협의회 회장)
    • 김상찬(민주헌정연구회 부산지부 대표)
    • 박찬종(통일민주당 부산 제1지구당 위원장)
    • 김종순(민주산악회 부산지부 대표)
  • 상임집행위원
    • 노무현(상임집행위원장)
    • 김기수, 김상찬, 김영수, 김용환 김인호, 문재인, 배갑상, 소 암, 이광수, 이재만, 하 일,
      고호석, 김재규, 홍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