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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30년 부산사업추진위원회 (Busan Derhocratic Mornorial Association)

7, 8, 9월 노동자대투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울산지역보다 다소 늦었으나 부산지역 노동자들도 1987년 7월 중순경부터 대투쟁의 대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3일에는 장림동 동아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이 1일간 파업농성을 하여 임금 25%인상, 상여금 연400%지급 등 4개항의 요구 사항을 관철 시켰고, 17일에는 르까프 신발 제조업체인 ㈜풍영에서 노조위원장 퇴진, 부당근로연장 취소 등을 요구하는 농성이 있었다. 이 당시 부산지역의 쟁의는 크게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7월 23일 태광산업의 노동자 투쟁에서 8월초까지의 시기로 투쟁의 도입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2기는 8월초에서 9월초까지로 제1기에 형성된 투쟁의 성과가 전 산업, 전 업종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마지막 제3기는 9월초부터 12월말로 일시적으로 노동자 투쟁이 후퇴하는 시기이다. 6월 민주항쟁으로 고무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7·8·9월에 걸쳐 총 3백63건의 쟁의 건수를 기록하였고, 이 과정에서 1백9개의 신규 노조가 설립되었다.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으로서 한국 노동운동의 중대한 전환을 이루어 낸 대 투쟁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자.

제1기 : 7월 23일에서 8월초
태광산업 노동자 투쟁

1987년 7월 23일 태광산업 동래공장 노동자 1천5백여 명은 점심시간 후 ‘인간차별 철폐하라’, ‘어용노조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투쟁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상여금 인상, 휴가 보너스비 지급 등의 요구 사항을 완전히 쟁취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 노동자들은 마침내 17개 항의 요구 조건을 모두 관철시켜는 통쾌한 승리로 끝났다. 태광산업 노동자의 쾌거는 신문매체와 야간학교 학생들을 통해 부산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대한조선공사 노동자투쟁

1986년 중식 거부 투쟁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된 일상투쟁 속에서 단련되어 왔으며 , 1987년 봄 노조 정상화 추진위를 구성하여 투쟁을 준비해 온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7월 25일 관리자들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적은 벽보를 찢어 내는 것에 항의하며 곧 바로 태종로를 점거하며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노동자들은 대표부 를 구성하고 20개 항의 요구를 제시하면서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다음날 새벽 4시 경 무장한 전경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농성장에 난입하여 노동자들을 마구 잡이로 구타하 였고 51명을 불법으로 연행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출근과 함께 다시 투쟁대열을 정비 하고 자위대를 구성하여 경찰의 탄압에 대비했다. 회사 측의 무성 의한 태도로 계속 협상이 지연되자, 28일 밤12시경 노동자들은 지게차를 앞세우고 쇠파 이프 등으로 무장하여 거리 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당황한 경찰과 회사 측은 29일 12시까 지 확답할 것을 약속하 여 투쟁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다음, 가족, 통반장까지 동원 한 악 선전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투쟁 대열을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회사 측의 와해 공작에 도 가족들은 회사 앞을 지키며 투쟁을 지원하였지만, ‘강제 진압’, ‘조공은 부채로 문을 닫게 될 것이다’는 협박 과 협상대표부들의 분열로 인해 점차 투쟁 대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8월 31일 상여금 300% 휴가비 60% 노조 민주화를 위한 조합원 총회 보장 등의 선에서 일단 협상이 이루어 졌고, 이후 민주노조를 건설한 뒤에 다시 임금인상 등을 협의하기로 하면서 농성을 풀었다.

대선조선
세신정밀 노동자 투쟁

노조위원장 직선제, 임금 상여금 인상 등 내걸고 1987년 7월 27일부터 투쟁에 돌입한 세신정밀 노동자들은 회사 측의 급식 중단과 단수, 휴업 조치, 대학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악선전 등에도 불구하고 일치단결하여 6일간의 투쟁 끝에 상여금 250%, 휴가비 3만원 등 획득하였다.

국제상사 노동자 투쟁

1987년 7월 28일 구사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전국을 경악케 한 국세상사 투쟁이 시작되었다. 회사 측은 다음날부터 양일간(29,30일)의 휴업공고를 내걸고 협상대표를 감금하여 경찰에 인계하려는 등의 강경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굳센 단결로 협상대표를 구출하고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30일 아침 기숙사에서 철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휴업 공고 에서 불구하고 출근하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회사 정문으로 대열을 지어 들어가자, 회사 안에는 일당 3만원에 고용된 깡패와 관리자들로 구성된 구사대가 망치,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농성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구사대의 폭력은 기숙사로 후퇴하는 농성 노동자들을 따라 기숙사까지 난입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구사대의 끔찍한 폭력으로 58명이 부상하였으며, 30명이 사망하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근의 사상구 주민, 지원 투쟁에 나선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모여서 국제상사의 노동자들을 도와주고자 했으며, 30일 밤에는 농성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주위를 지키던 시민들도 밤을 지새우며 구사대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31일 농성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어린 기숙사생 들이 험악한 공포 분위기에 질려 동요하는 가운데 회사 측이 50% 휴가비를 지급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투쟁대열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1일부터 4일간의 휴가에 들어가자 소수의 농성 노동자만 남게 되어, 이들은 구사대의 폭력을 피해 사상성당으로 옮겨 농성을 계속했다. 사상성당에 모인 40여 명의 노동자들은 폭력적인 탄압의 진상규명과 사후의 보복조치 금지 등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매일 7시 30분에 성당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며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의 정당성, 회사의 폭력성 등을 일반 시민들에게 선전하였다. 18월 6일 오후 1시30분, 회사 정문 앞에서 다시 300여 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할 대기 중이던 전경들이 회사 안으로까지 밀고 들어와 최루탄을 쏘아대며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8명을

8.13 _국제상사

연행해 갔다. 노동자들은 회사 옥상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정당한 방어를 위해 신발과 화분 등을 던지며 맞섰고 경찰을 불러들인 관리자 2명을 구금하여 교환을 조건으로 동료들을 석방 할 것 을 요구하여 경찰로 연행된 동료를 구해 냈다. 8월 7일 조반장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사 위원회가 정상조업’과 불순세력 몰아내자‘는 등의 회사 측 입장을 대변하면서 성당에 농성중 이던 동료 노동자들을 ‘ 해산하기 위해 성당 안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다. 이후 보너스 300 % 지 급, 사후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얻어내어, 비록 이 합의가 만족할 만 한 성과는 아니 지만 현장에서 동료와 함께 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들은 농성 해제를 결의 하고 17일부터 정상 적으로 출근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사장 심재영의 ’사후 보 복조치는 없다‘ 는 약속은 17일 아침부터 농성 참가자들이 사무실 및 사업부장실, 관리과로 불려가서 감금상 태에서 폭행 을 당하면서 그것이 새빨간 거짓 약속이었음이 드러났다. 현장 동료들의 ’수고 했다‘는 대대 적인 환영에도 불구하고 관리자들은 이른바 주동자급을 낙인 찍어 현장 동료와 함께 일하지 못하도록 격리시키거나, 일을 못시키겠다며 협박하였다. 8월 19일에는 농성자 대표였던 김행란양에 대한 악선전이 시작되었고 퇴근 후에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사문서 위조‘ 명목으 로 구속되었다. 악선전의 내용은 ’지문조회를 해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다’, ‘간첩이다’, 회사 를 망치려고 한다.’ 등이었다. 이후 8월말까지 10명의 부당해고자가 발생하 고 회사 내의 작업환경은 더욱 열악해졌다.

제2기 : 8월초에서 8월말까지

제1기의 노동자 투쟁이 비교적 대규모의 사업장 중심이었다면, 제2시기에는 전 산업에 걸쳐 모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이 시기의 노동자 투쟁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버스 노동자 투쟁

8월 1일 천일, 고려여객 소속 시외버스 기사와 안내양 300여명이 임금인상, 상여금 400% 보장 그리고 인격적 대우 등을 요구하며 파업하다가 오후부터 운행을 재개하였다. 이 투쟁을 시작으로 8월 9일 부산의 시내버스 59개 회사가 전면 운행을 거부하기로 했으나, 최종적으로 9개 회사만 파업하였다. 그러나 8개 회사는 오후부터 운행을 재개하여, 결국 유성여객의 100여명만 종일 파업을 하게 되어 지역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의 투쟁은 단위 회사별로 진행되었다. 대진버스 운전기사 100여명은 심야 근무수당 지급 등 13개 항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 119번 94대가 운행을 정지하였으며, 8월 12일 오전 5시부터 부일여객 운전기사 130여명은 주차장에서 운행시간 조정, 휴가비 지급 등 8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트럭 노동자 투쟁

8월 3일 한진트레일러 운전사와 정비사 190명은 어용노조 퇴진, 근로조건 개선, 임금인상, 전국노조위원장 퇴진 등 13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8월 6일 부산 대한통운 트레일러 운전사 100여명은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철야운행 시 교통비 지급 등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8월 12일에는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운영공사 소속 노동자 520여명과 컨테이너 수송업체 동방의 운수노동자 60여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여 부두 기능이 일시 마비되었으나 13일 타결되었다.

대형선망 노동자 투쟁

어용노조의 임금협상 결과에 불만을 품고 8월 9일 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선원들은 10일 7시경 부산공동어시사장 광장에서 집결하여 어용노조 퇴진, 기본급 20% 인상 등 17개 항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다음날 모 회사의 배가 출항한다는 소식에 ‘우리의 요구 관철 없이 출어가 웬 말인가?’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충무동쪽으로 진출하였다. 경찰의 저지에 분노한 일부 선원들은 공동어시장 2층에 올라가 기물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농성장에 난입했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직격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경찰의 폭력에 분노한 선원들은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충무로, 남포동 일대에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전개되었다. 언론은 선원들의 투쟁을 과격난동으로 매도하였고 , 일부 선원의 기물 파손 장면만 크게 다루었을 뿐 경찰의 무자비한 직격탄 난사와 그로 인한 부상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대형 선망 선원들의 쟁의는 그 격렬성에도 불구하고 조직성의 부족으로 인해 그 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택시 노동자 투쟁

부산의 1백여 개 택시회사 운전기사 500여 명은 18일 밤 11시 서면로터리 등지에 택시를 세워 둔 채 철야농성을 벌이다 19일 오전 6시경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8일 오후 6시 30분경 택시운전사 200여명이 노동복지회관 앞에 모여 임금인상 보상 등 4개항 결의안 을 채택하여 농성을 벌이자 14일째 농성 중인 한진교통 운전사들이 합세하여 농성자는 5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중 30명은 11시경 택시를 몰고 문현로터리를 거쳐 서면로터리 로 진출했다. 이어 19일 새벽 1시경 다른 2백여 명이 택시를 몰고 서면로터리와 전포1동 입 구에 도착하여 농성을 계속했으며 새벽 4시경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시위 진 압 중 전경 1명이 택시에 매달려 100미터 가량 끌려가다 떨어져 중태에 빠졌으며, 취재하던 부 산일보사 기사가 맞아 부상을 당했다. 경찰은 이날 21명을 연행했다.

이석규 열사 장례식 날의 부산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 날인 1987년 8월 28일 부산의 1백8개 택시회사 8천1백20대의 택시 가 오후 4시를 기해 일제히 총파업에 들어갔고, 7시 사상역에서 거행하기로 했던 이석규 열 사의 장례집회가 3천여 전경의 원천봉쇄로 인하여 불가능하게 되자, 노동자 1천여 명이 가두 투쟁을 전개했다. 택시기사들은 택시를 몰 고 거리로 나왔으며, 각 사업장에서 투쟁 하던 노 동자들은 거리로 나와 투쟁대열에 합류하였다. 새벽 4시까지 사상, 개금, 가야, 서면의 거리 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계속 되었으나 가두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단지 산발적으로만 참 여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투쟁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이석규 열사 추모제
제3기 : 9월에서 12월말까지

조선공사는 부산지역 투쟁의 선봉에 서서 싸움을 전개하여 노조 민주화를 위한 조합원 총회를 보장 받은 후 8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위원장을 선출하여 노조를 정상화시킨 후 바로 임금인 상 투쟁에 들어갔다. 9월 21일부터 단체교섭에 들어갔으나 회사 측의 무성의로 협상이 결렬되자 조합원들은 출근과 동시에 파업에 들어갔고 새로 구성된 노조 집행부는 회사와 경찰의 기만 적인 술책에 다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조합원들의 강철 같은 단결로 26일 임금 25% 인상을 쟁취해 내었다.

한편 새한운수 노동자들은 사장이 노조 부위원장 등 3명을 폭행죄로 고소하자 노조간부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9월 10일부터 전면 파업을 시작했고 26일부터 민주당사에서 무기 한 농성에 들어갔다. 덕양냉동(주) 노동자들도 회사 측에서 위원장, 부위원장 등 간부 10여명을 해고시키려 하자 농성에 돌입하였다. 15일간의 굳센 투쟁으로 10월 3일 10명 전원 복직, 임 금 20%인상, 노조활동 보장 등을 쟁취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한진 컨테이너 소속 운전기사 50여명이 구사대를 통한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농성에 돌입하였다. 11월 1일 해운대의 동부고 속 동래지점 운전기사 60여명은 월급제 실시, 민주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특히 동부고속 동래지점 운전기사들의 투쟁은 가족끼리 함께 한 끈질긴 싸움을 통해 월급 6%인상, 노조 분회 인정, 고정급비율의 상향조정, 농성 기사와 가족에 대한 고소 추하 등을 합의한 승리로 끝났다. 11월 2일에는 대선조선 노동자 3백여 명이 어용노조 퇴진과 지난 노사분규 때 합의한 임금인상 등 15개항의 조기 수락을 요구하며 작업거부에 들어갔다. 11월 5일에는 신발공장인 하남(주) 재봉부 노동자 3백여 명이 임금인상, 상여금 추가 지급 등 3개 항을 요구하며 출근 거부와 태업을 실시했다. 대우정밀은 12월 11일부터 상여금 600%를 요구하며 투쟁에 돌입하여 잔업 거부, 임시총회 개최, 중식 거부 등 전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 속에 준법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일부관리자와 회사 측은 노동자의 요구를 거부하고 노조의 와해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은 단결된 힘으로 회사의 책동을 물리치고 29일 상여금 550%,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전근무라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8.15_경동산업 8.19_동양고무